~해외입양인들과 한국의 친생가족들,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소식을 보내드린지 어느덧 6개월 즈음이 되고 있네요. 후원자님 한 분 한 분의 삶 가운데 선한 힘이 머무는 은총이 깃들기를 기원드립니다. 오늘은 그동안의 사업을 일일이 소개하는 대신, 뿌리의집의 일을 통해 해외입양인들과 친생 가족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일 여럿 중, 다섯 꼭지를 추려 보내드립니다.
뿌리의집에는 입양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친생가족들로부터도 꾸준히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러한 문의는 계속 증가해 왔으며, 제한된 인력과 자원으로 인해 모든 사례를 원하는 만큼 신속하게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뿌리의집은 매주 3~4건의 친생가족 확인 사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생가족을 찾아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정부기관과 입양기관들이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거나 접근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아 가족을 확인하고 연락을 취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릅니다.
인권, 진실, 그리고 화해를 위한 뿌리의집의 활동은 이러한 증가 추세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입양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밝혀지면서 자신의 출생 배경과 가족사를 알고자 하는 입양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언론에서 해외입양 문제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보도함에 따라 친생가족들 역시 뿌리의집을 찾거나 연락을 취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최근 뿌리의집이 진행해 온 사례들 가운데 다섯 꼭지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뿌리의집은 대부분의 경우 정부기관의 실질적인 협조 없이 조사를 진행해야 하므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이는 마치 탐정 수사와도 같은 작업입니다. 뿌리의집은 위조되거나 조작된 입양 서류에 대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친생가족과 입양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이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 긴 글인데, 혹 틈을 내셔서, 끝까지 읽어주시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이야기 하나: 우리는 함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덴마크 입양인 Lina(가명)는 1980년대 말 출생 후 수개월 만에 유럽으로 입양되었다. 입양기록에는 폭력적 상황에 처한 생모가 양육을 포기하고 입양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2025년, 30대가 된 리나는 입양기관에 생모 찾기를 의뢰했다. 기관은 생모를 찾았지만 치매로 인해 만남에 대한 동의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례를 종결했다. 현행 제도에서는 친생부모가 명시적으로 동의한 경우에만 연결이 가능하며,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의사 표현이 어려운 경우는 사실상 '부동의'로 처리된다.
그러나 리나는 어머니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고령이고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급해졌다. 이후 뿌리의집이 추가 조사를 진행한 결과, 어머니가 한반도 남부 지역_정읍_의 한 재가센터와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여름, 리나는 한국을 방문했고 우리는 함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다. 처음 만난 어머니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상태였지만, 리나의 사진과 한국 이름을 보여주자 곧바로 딸을 기억해냈다. 어머니의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어린 시절 해외로 보낸 딸의 존재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리나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어머니의 일상을 함께 둘러본 뒤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한국을 떠났다. 뿌리의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리나를 도와 전화로 어머니의 안위를 파악하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뿌리의집은 기록이 끊겼거나 제도가 길을 막고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따라 끝까지 더듬어 가본다. 친생가족찾기에는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둘: 아프리카의 왕자
이 사례의 한국인 친모는 대한민국의 외화 획득 정책에 따라 서독으로 파견된 수많은 한국인 간호사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녀는 1960년대 서독으로 건너가 간호사로 근무했다.
그녀는 서독에서 한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하였고, 이후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 년 뒤 그 아이는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
입양기관의 기록에 따르면 친모는 한국인이었으며 친부는 미군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입양인은 다인종 배경을 가진 아동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인이 된 입양인은 DNA 검사를 실시하였고, 영국에 거주하는 한 여성과 유전적 일치가 확인되었다. 입양 서류의 내용으로 볼 때 우리는 그녀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 여성은 나이지리아 라고스 출신이었다.
그녀와의 소통과 조사 결과, 런던에 거주하던 이 여성은 친부 측 사촌으로 밝혀졌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왕이었으며, 입양인의 친부는 라고스의 왕자였다고 설명하였다.
1960년대 후반, 라고스의 왕자와 왕세자는 유학을 위해 서독으로 건너갔다. 당시 왕실에서는 왕자들이 유럽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국제적 경험을 쌓는 것이 전통으로 여겨졌다.
서독에서 왕자는 한국인 여성을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왕이 사망하였고, 왕자와 왕세자는 급히 귀국해야 했다.
아이의 출생 직후 친모는 아이를 데리고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몇 년 뒤 아이는 유럽의 한 국가로 해외입양 되었다.
뿌리의집은 이 사건을 2년 동안 조사해 왔다. 조사 과정에는 서독의 기록보관소와 각종 역사 자료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도 포함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서독에 파견되었던 한국인 간호사와 노동자들의 생활상과 근무 환경에 대해 매우 중요한 자료와 통찰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식은 현재 뿌리의집이 진행하고 있는 다른 유사 사건들의 조사에도 활용되고 있다.
광범위한 조사 과정에서 뿌리의집은 오래된 구 호적(舊戶籍)의 번역본을 발견하였다. 해당 문서는 한국어로 작성된 원본 호적의 영어 번역본이었으나, 원본 호적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뿌리의집은 번역의 근거가 된 원본 호적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공공기관에 문의하였다. 그러나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와 기록 열람 문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협조를 얻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결국 뿌리의집은 여섯 곳의 공공기관을 방문하거나 연락한 끝에 원본 호적을 찾아보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조사 결과, 해당 입양인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정보 접근 권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대한민국 국민은 본인의 가족관계 기록을 통해 3대에 걸친 가족 정보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별도의 동의나 특별한 절차가 요구되지 않느다. 반면 현재 대부분의 해외입양인들은 자신과 친생가족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충분히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입양인이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뿌리의집은 해당 입양인과 관련된 가족관계 기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친모뿐만 아니라 더 넓은 범위의 친생가족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입양인은 친부 측 가족과 한국의 친생가족 모두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신의 가족사와 뿌리를 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 입양인은 기록 상으로 3대에 걸친 자신의 가계도를 손에 얻은 일만으로도 깊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뿌리의집은 다시 한 번 입양인들이 자신의 배경정보의 확인만으로도 자긍심의 고양과 정체성에 대한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기 셋: 사랑하는 계부
어느 날 한 한국인 남성이 뿌리의집(KoRoot)에 연락해 왔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과 결혼 전 다른 남성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딸이 있었으며, 그 아이는 수십 년 전 한국의 한 입양기관을 통해 해외로 보내졌다고 설명했다. 아내는 당시 아이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내는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애써 왔고, 마침내 아이가 보내진 것으로 알려진 국가까지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내를 매우 사랑한다고 말했다. 또한 오랜 동안 생업에 매달리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바쁘게 살아오면서 정작 아내의 아픔과 고통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아내가 지난 4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딸을 그리워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아내는 매일 딸이 어디선가 무사히 살아가고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해 왔다고 했다.
그는 뿌리의집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내의 잃어버린 딸을 찾는 것이 자신이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며, 아내가 오랜 세월 품어 온 한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친생모의 현재 남편, 즉 입양인의 계부였다. 그는 뿌리의집이 딸을 찾는 동안 자신은 친생부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과거 아내와 함께 아이를 낳았던 그 남성의 행방을 직접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친생모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뿌리의집은 아이가 보내진 것으로 알려진 국가에서 대대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보는 많지 않았다. 아이의 한국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해당 국가로 보내진 것으로 알려진 날짜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에서 9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찾는 일에 참여했다. 이들 가운데는 같은 나라에 거주하는 해외입양인들도 있었고, 사연을 접한 일반 시민들도 있었다.
뿌리의집에는 수많은 제보가 접수되었다. 대부분의 제보는 우리가 가진 정보와 일치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확인하고 검토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조사가 시작된 지 약 2주가 지났을 무렵, 여러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인물을 지목하는 제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여성은 우리가 찾고 있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다.
뿌리의집은 마침내 그 여성의 연락처를 확인했고, 한국에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먼저 한국의 비영리단체인 뿌리의집에서 연락드린다고 소개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수 있다며 양해를 구한 뒤, 한국에서 한 가족이 오랫동안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이 혹시 본인일 수 있어 연락드렸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한국에서 해외입양되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다. 이어 한국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물었고, 그녀가 말한 이름은 친생모와 계부가 알려준 이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또한 언제 해당 국가로 입국했는지 물었는데, 그 날짜 역시 친생모가 기억하고 있던 날짜와 같았다.
우리는 그녀에게 친생모와 계부, 그리고 남동생이 오랫동안 그녀를 찾고 있으며 뿌리의집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친생모가 가장 알고 싶어 했던 것은 딸이 살아 있는지,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 여부였다고 전했다. 우리는 한국의 가족에게 그녀가 무사히 살아 있으며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동안 흐느끼며 울기만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뒤 그녀는 자신 역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친생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부기관과 입양기관들은 그녀에게 자신은 부모를 알 수 없는 고아이며 길거리에서 발견된 아이였다고 설명했고, 결국 가족을 찾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너무 큰 충격과 감정에 휩싸여 더 이상 말을 이어가기 어려워했다. 우리는 집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배우자와 함께 집에 있다고 답했다. 이에 우리는 잠시 통화를 중단하고 배우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30분 뒤 다시 통화하기로 했다.
30분 후 다시 연결된 영상통화에는 그녀의 배우자와 아들도 함께 참석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희망을 잃었었다고 말했다. 한국의 기관들은 반복해서 그녀가 길거리에서 발견된 아이이며 알려진 친생부모가 없다고 설명했고, 그 때문에 더 이상 찾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국 가족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친생모가 딸이 사라진 이후 4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전했다. 또한 이번 수색은 계부가 먼저 제안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었으며, 모두가 그녀를 찾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녀가 젊은 시절의 친생모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뿌리의집이 맡은 역할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그녀가 살아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 가족에게 그녀가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도 되는지 다시 한번 허락을 구했다. 또한 한국의 가족들이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도 전했다.
뿌리의집은 친생가족과의 만남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재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첫 만남 이후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인 뒤, 자신이 그보다 더 바라는 일은 없다고 답했다.
한국에서는 친생모와 계부에게 딸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계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친생모는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뿌리의집에도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은 온라인으로 처음 재회했다. 뿌리의집은 입양인과 한국 가족 모두가 원활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한국어 통역 인력을 배치해 지원했다. 몇 달 뒤에는 입양인과 그녀의 가족이 한국 가족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현재도 뿌리의집은 입양인과 한국 가족 모두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관계 형성과 가족 간의 교류가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야기 넷: 잃어버린 이름, 되찾은 가족
DNA 검사를 통해 마침내 친가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입양인은 DNA를 통해 친가족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선뜻 믿기 어려웠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친가족을 찾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고, 결국 모든 희망을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입양기관과 한국 정부기관들은 입양인에게 친가족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고 설명해 왔다. 입양서류에는 친모가 아이를 길에 유기하였고, 이후 아이가 발견되어 보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DNA 검사는 전혀 다른 사실을 드러냈다. 친모는 오랫동안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이다.
뿌리의집는 입양인의 가족 상봉을 지원하였고, 입양인은 친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지 약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입양인은 뿌리의집에 연락해 왔다. 한국에 있는 친오빠가 그동안의 도움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며 점심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식당에서 입양인과 친오빠를 만났다. 두 사람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입양인은 친모와 친가족 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식사 도중 입양인은 F-4 비자를 받는 방법을 물었다. F-4 비자는 과거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사람이나 해외입양인 등이 신청할 수 있는 특별한 체류자격이다. 우리는 먼저 신중하게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고 설명했다. 경우에 따라 F-4 비자 신청 과정이 국적 문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관련 사실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친오빠에게 입양인이 어릴 때 가족에 의해 출생신고 또는 호적 등록이 이루어진 적이 있는지 물었다. 친오빠는 그렇다고 답하며 여러 장의 서류를 보여주었다.그가 보여준 서류는 홀트가 보관하고 있던 입양기록 속 호적 내용과 전혀 달랐다. 확인 결과, 친가족은 아이가 태어난 직후 정식으로 아이를 등록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아이가 두 살 무렵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홀트는 아이를 전혀 다른 신원으로 다시 등록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주었다. 친오빠가 보여준 원래의 호적에는 홀트의 입양서류에 기재된 내용과 전혀 다른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이를 확인한 입양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몇 년 전, 친가족을 찾기 전이었던 그녀는 홀트의 입양서류에 적혀 있던 한국 이름을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고 믿고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우리는 친오빠가 가져온 서류와 홀트의 입양기록을 나란히 비교해 보았다. 결과는 분명했다. 두 서류에는 서로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고, 생년월일 또한 서로 달랐다.
그 순간 친오빠가 입양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누나, 일주일 내내 울었는데 또 우네. 이제는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돼. 입양인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몇 년 전 어렵게 되찾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한국 이름이 사실은 잘못된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리기 위해 우리는 농담처럼 말했다.
그래도 그 이름을 몸에 문신으로 새기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실제로 일부 입양인들은 입양서류에 적혀 있는 한국 이름이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고 믿고 몸에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 이름이 입양기관이 만들어 낸 가짜 신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이 입양인에게는 두 개의 한국 신원과 두 개의 주민등록 관련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원래의 호적에는 입양인의 실제 이름과 실제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해당 서류에는 법원의 기록과 주석도 남아 있었다. 입양인이 50년 전 실종되었을 당시, 가족은 아이를 실종아동으로 신고하였다. 한국에서는 장기간 행방불명 상태가 지속될 경우 실종선고 절차를 통해 법적으로 사망 처리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가족은 약 45년 전 법원에 신청하여 아이가 사망선고를 받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서류에 남아 있는 법원의 도장과 기록은 바로 그 절차의 결과였다. 그 덕분에 아이는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지 않았으며, 가족의 기록 속에서 계속 실종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결국 입양인은 지난 50년 동안 한국에서 실종아동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진짜 신원 역시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 말해, 입양인이 해외로 입양된 이후에도 한국에는 그녀의 실제 이름과 실제 생년월일, 그리고 가족관계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 입양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 여권도 발급받았다. 얼마 전 그녀는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생년월일에 맞춰 생일을 축하했다고 전했다. 또한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덴마크의 집까지 처분하였으며, 올여름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50년 동안 잃어버렸던 이름과 가족을 되찾은 그녀에게, 한국은 더 이상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이제 한국은 그녀가 다시 살아갈 고향이 되었다.
이야기 다섯: 사라진 아들
8개월 전, 한 한국인 어머니와 딸이 잃어버린 아들이자 형제를 찾고 싶다며 우리에게 연락해 왔다. 그 아들은 1978년 친어머니의 품에서 강제로 빼앗긴 아이였다. 어머니는 한국의 한 입양기관이 자신의 아이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1978년 해당 입양기관을 찾아가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으며, 이미 아이가 유럽의 한 국가로 보내졌다는 답변을 들었다.
1979년, 어머니는 아이가 어느 나라로 보내졌는지를 알아냈다. 이에 그녀는 해당 수령국의 입양기관과 정부 당국에 연락하여 아이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수령국의 당국과 입양기관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1979년부터 1995년까지 매년 지속적으로 수령국에 연락했지만 끝내 어떠한 답변도 받지 못했다.
이제 어머니와 딸은 우리에게 사라진 아들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단 8분 만에 수령국에서 그 아들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입양인의 입양가족 누나가 뿌리의집의 국제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었고, 우리가 올린 가족 찾기 게시물을 보자마자 즉시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이 사건은 실종된 입양인을 찾는 데 있어 가장 빠른 기록을 세운 사례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건들이 얼마나 복잡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입양인을 단 8분 만에 찾아냈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8개월이 걸렸다. 이 사례는 입양인을 찾아내는 일 자체는 오히려 가장 쉬운 과정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진정으로 어려운 일은 수십 년 동안 믿어 온 잘못된 정보와 마주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이며,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평생 믿어 왔던 현실과 전혀 다른 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 누나 역시 한국에서 해외입양된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은 친남매는 아니었다. 같은 입양가정에서 함께 자란 두 명의 한국계 입양인이라면 서로 입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양형제자매로 성장한 한국계 입양인들은 입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오히려 그런 대화가 예외에 가깝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서로 다른 친가족에게서 태어나 한국에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입양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입양가족의 누나는 입양인인 남동생에게 직접 연락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동생이 다소 거부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도 오랫동안 친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입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매우 꺼려 왔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한국의 가족에게 아들을 찾았지만 그가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동시에 그가 건강하게 살아 있으며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또한 그가 결혼하여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을 두고 있으며, 유럽의 대기업에서 성공적인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설명했다.
우리는 한국 가족에게 이러한 상황이 일부 입양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많은 입양인들이 위조된 입양서류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살아왔기 때문에, 실제 진실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몇 달 후, 입양인이 우리에게 직접 연락해 왔다. 그는 자신의 서류에는 어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포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버렸다고 믿어 온 친어머니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왜 갑자기 자신을 찾으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우리는 이 내용을 친어머니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긴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꼭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편지에는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상세히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빼앗겼으며, 이후 수년 동안 아이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편지에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입양기관과 정부기관을 상대로 반복적으로 아이의 반환을 요구했던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편지를 접한 후 입양인은 다시 우리에게 연락했다.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DNA 검사가 완료되면 어머니와 연결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입양인들이 새로운 진실과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 준다. 위조된 입양기록에 담긴 허위 정보는 매우 해롭다. 그러한 정보는 입양인의 정체성 일부가 되며, 버림받았다는 감정은 너무도 강하게 자리 잡아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심리적 방어벽을 형성하게 만든다.
이 사건은 안타깝게도 수많은 다른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부모들이 빼앗긴 자녀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보여 준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수령국에서도 발생한 명백한 범죄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어머니가 1978년과 1979년에 입양기관과 정부 당국에 연락했을 당시 입양 절차는 아직 최종적으로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령국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국인 어머니의 반복적인 요청을 무시한 불법적 행위를 시사한다.
도난당한 한국 아동의 해외이송 및 입양 과정에서 발생한 위법성에 관한 본 사안의 원칙적·법적 쟁점은 현재 수령국의 관계 당국에 정식으로 제기되어 있다.
이 사건은 실종된 입양인을 찾은 사례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 안에 당사자를 확인한 경우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건들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수반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는 입양인을 단 8분 만에 찾아냈지만, 어머니와 아들이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8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사례는 사람을 찾는 것 자체보다 그 이후의 과정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수십 년 동안 사실로 믿어 온 기록과 기억을 다시 돌아보고,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하며, 그 진실을 자신의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는 자신이 평생 믿어 왔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현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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